마을 다음엔 또 다른 마을이 있다 (기사 출처: 한국경제신문)

2008.12.05·by 서병익
11,841
회사원이 대형 도서 매장에 들렀다. 그런데 한 남자가 책꽂이 여기저기서 책을 고르더니 한 아름을 계산대로 가져갔다. 회사원은 부러워서 한 마디 건넸다.
“좋은 책 골라 보며 하루 종일 책속에 묻혀 사니 얼마나 좋으시겠어요. 나야 먹고 살기 바쁘다보니 그 좋아하는 책을 보며 여유 있게 자기 충전을 한 때가 언제인지도 몰라요.”
남자는 도서 기획 전문가였다. 그는 조용히 책을 내려놓으면 부러움에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는 회사원에게 말을 건넸다.

“제 소원이 뭔지 아십니까?”
“........”
“이 지긋지긋한 책으로부터 벗어나는 겁니다.”

남들은 지하철에 붙어있는 광고물을 재미있게 즐기지만, 이 전문가는 광고를 세심하게 뜯어보며 잘잘못을 가리느라고 내릴 곳을 지나친 일이 한 두 번이 아니다. 가족들과 길을 걸으면서도 어느새 눈길이 간판들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심지어 일상 만사를 잊어버리려고 한 잔 하고 들른 노래방에서 조차 화면에 뜬 노래가사의 철자법이며 띄어쓰기를 지적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고 한다. 회사원에게 책은 휴식이지만 도서 기획 전문가에게 책은 일거리에 따름이었다.

미국에서 빌딩을 몇 채나 소유한 거부가 영양실조로 사망한 적이 있었다. 맨해튼에서 남부럽지 않은 부자가 왜 굶어죽어야 했을까.
어린 시절 극심하게 가난했던 그 거부의 절실한 소망은 돈을 많이 모으는 것이었다. 나이가 들어 그의 소원대로 엄청난 돈을 벌었지만 문제가 하나 있었다. 목숨보다 소중한 돈을 지키기 위해 절대로 남을 믿지 않았던 것. 심지어 유산을 노리고 음식물에 독을 넣지 않을까 의심해서 가족들조차도 믿지 못해 같이 식사를 하지 않고, 행인을 가장해 햄버거를 사와서는 혼자 먹었다. 이렇게 몇 년을 지속하다 결국 영양실조에 걸려 어마어마한 금고 앞에서 굶어죽은 것이다.
어떤 자에게 돈은 꿈이지만, 어떤 자에게 돈은 근심일 뿐이었다.

붕어빵에는 붕어가 없다. 멀리서보는 산과 숲에 들어간 산은 다르다. 멀리서 보는 물은 아름답지만 물속에 빠지면 익사하고 만다. 우리가 애걸복걸하는 최고의 가치들은 마치 무지개처럼 이루지 못한 희망이기 때문에 찬란해 보일지 모른다.

소유하지 못했을 때 동경이 생기고 이상이 자란다. 거대한 이상과 아름다운 행복은 잘 정돈된 도시가 아니라 다소 부족한 야생에서 피어나는 꽃과 같다. 뭐든 게 다 갖춰진 풍요 속에서는 정신과 영혼이 성장하지 못한다. 그러니 설사 잃었더라도 그렇게 섭섭해 할 필요는 없다. 마을 다음엔 다른 마을이 나타나는 것처럼 기회를 놓치면 새로운 기회가 기다리고 있기 마련이기에.

한 남자가 술자리에서 친구를 붙잡고 한탄을 했다.
“나 오늘 이혼 도장 찍었네.”
위로를 기대했지만, 친구는 뜻밖에 버럭 화를 냈다.
“자네는 결혼이라도 해봤지. 결혼도 한 번 못해본 나는 무언가.”

요즘 경기 침체와 주가 하락으로 얼굴 펴지 못하는 사람들이 참 많다. 그 친구라면 이렇게 말할지도 모르겠다.
“배부른 소리 말게. 자네는 잃을 돈이라도 있었지.”


기사 출처: 한국경제신문 (차길진의 혼테크 재테크중에서....)
로그인 후 댓글을 작성할 수 있습니다.

Comments0

결제안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