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공관, 메디움 그리고 나

2024.01.09·by 야채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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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금번 메디움 MK3 공제를 신청했던 초보 오디오파일입니다. 공제에 앞서 메디움 MK3에 대한 실사용기가 많지 않아 한참을 망설였더랬죠. 저처럼 본기에 대해 궁금증을 가진 분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고자 후기를 남깁니다. 경험이 일천하고 식견도 부족하니 혹 내용이 부실하더라도 너그러이 양해를 바랍니다. 

 

진공관 입문

진공관의 독특한 음색과 분위기에 사로 잡힌 저는 레벤 CS600으로 진공관에 입문했습니다. 진공관 앰프만 장만하면 될 줄 알았는데 그건 크나큰 착각이었습니다. 각기 다른 진공관으로 다양한 음색을 즐기는 롤링의 세계를 접한 저는 진공관의 늪에 완전히 빠져버렸습니다. 정말 다행스럽게도 제가 사용하는 CS600은 CS600X와는 달리 초단관(6CS7) 선택의 폭이 제한적이라 더 큰 출혈을 막을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저는 진공관 앰프와 행복한 날들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서병익 오디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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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히 300B 앰프와 클립쉬 라스칼라의 꿀 조합을 경험한 뒤 진공관에 대한 갈증은 점점 더 심해졌습니다. 병세가 깊어진 저는 진공관의 특성을 극대화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타이달 스트리밍을 이용하는 현 상황에서 앰프 이외에 진공관을 추가할 수 있는 부분은 DAC 뿐이었습니다. 그렇게 진공관 DAC에 대해 알아보던 저는 우연히 네이버 카페를 통해 메디움 MK3 공제 소식을 접했습니다. 서병익 오디오. 오디오쇼에서 몇 번 들락날락 거리기는 했지만 크게 관심을 두지는 않았던, 꽤 많은 사람들로 북적이던 부스의 모습이 어렴풋이 떠올랐습니다. 오랜 기간 진공관 앰프 제작에 투신한 서병익 선생님의 장인 정신에 이끌렸던 걸까요? 아니면 진공관의 마력이 저를 끌어당겼던 걸까요? 그렇게 저는 메디움 MK3에 대한 조사에 착수했습니다. 그러나 초보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제원과 인터넷을 뒤져봐도 도무지 나오지 않는 실사용기로 인해 더 이상 나아가질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오디오쇼에서 제품을 직접 보고 결정하리라 마음을 먹었습니다. 하지만 아뿔싸. 참가 브랜드 리스트에서 서병익 오디오의 이름은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서병익 오디오 홈페이지에서 궁금한 점을 문의하고 서병익 선생님과 유선으로나마 짧은 대화를 나눴습니다. 서병익 선생님의 글과 목소리에서 묻어나는 인자함과 온화함에 감화된 저는 청음도 하지 않고 실물도 보지 않은 채 겁도 없이 메디움 MK3 구매를 결심했습니다. 

 

첫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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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초에 예약금을 지불하고 1월 초에 제품을 수령했습니다. 한 달이라는 시간이 그리 길게 느껴지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메디움 MK3와의 설레는 만남을 떠올리면 왠지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번졌습니다. 네가 4시에 온다면 3시부터 행복할 거라던 어린왕자처럼 말이죠. 본래 배송은 금요일에 출발해 토요일에 도착하는 일정이었지만 수령 장소가 사무실인 관계로 서병익 선생님께서는 제 편의를 봐주시어 하루 빠른 목요일에 발송을 해주셨습니다. 대망의 금요일, 사무실 문 앞에서 무언가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윽고 택배가 도착했다는 문자가 휴대폰을 흔들었습니다. 언박싱을 끝내고 마주한 메디움 MK3의 자태는 무척이나 단정했습니다. 그리고 제 생각보다 훨씬 더 무거웠습니다(무게가 7.7Kg정도 됩니다). 추운 날씨에 얼어붙은 메디움 MK3를 위해 2시간은 작동을 하지 않고 그대로 놔두었습니다. 지난한 기다림의 시간을 견뎌낸 뒤 케이블을 차례차례 연결하고 떨리는 마음으로 노브를 돌려 전원을 켰습니다. 주황색 불이 들어오고 메타의 바늘이 서서히 오른쪽으로 움직입니다. 정상 작동을 확인한 뒤 맥북과 아큐페이즈 E-380의 전원을 순서대로 인가했습니다. 소리를 들어봅니다. 스피커는 B&W 705S2. 훌륭한 스피커지만 장시간 들으면 왠지 모르게 피곤했던 녀석이 메디움 MK3를 연결하니 놀랍도록 부드럽게 소리를 풀어냈습니다. 사용 중이던 마이텍 브루클린 DAC+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따뜻하고 풍성한 음이라는 것을 막귀인 저조차도 단숨에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진공관의 특성이 진하게 묻어나길 원했던 저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습니다. 그리고 그 날 곧바로 집에 메디움 MK3를 데리고 갔습니다. 

 

본격 청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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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디오 랙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정체 불명의 선반에 메디움 MK3를 올려놓고 오렌더 N100H, RCA 6L6GC를 장착한 레벤 CS600, 그라함 LS5/9과 연결한 뒤 소리를 들어봅니다. 아. 다릅니다. 이전까지 들었던 소리와는 확연히 다릅니다. 풍성한 배음과 신비로운 여운이 공간을 가득 채웁니다. 소리가 유려하다는 서병익 선생님의 말씀이 그제서야 이해가 갔습니다. 무엇보다 이전에는 느낄 수 없었던 생동감이 전해졌습니다. 피아노 독주의 경우 전에는 연주자가 건반만 두드리는 것 같았다면 메디움 MK3를 연결하고 난 뒤에는 댐퍼 페달을 밟아가며 연주하고 있는 듯한 인상을 받았습니다. 또 한 가지 놀라웠던 점은 볼륨입니다. 메디움 MK3에는 볼륨 조절 기능이 없습니다. 그래서 레벤 CS600을 통해서만 볼륨을 조절했습니다. 그런데 전에는 9~10시 정도로 맞춰야 조용히 들을만 했는데 메디움 MK3와 연결하니 레벤 CS600의 볼륨 노브를 3칸만 돌리면 밤에 조용히 듣기에 차고 넘치는 소리가 나왔습니다. 정리하면, 메디움 MK3의 음은 부드럽고 풍성합니다. 그렇다고 해상도가 떨어지지도 않습니다. 타이밍이 아주 느리지도 않습니다. 메디움 MK3는 진공관의 특성을 고스란히 시스템에 입혀줍니다. 외관도 무척이나 마음에 듭니다. 저는 오디오에 관해서는 실버 색상을 좋아하는 변태적인 취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노브도 골드가 아닌 실버로 요청했습니다. 외관 전체가 실버였으면 너무 좋아서 쓰러졌을지도 모릅니다. 전면 패널의 마감은 대단히 훌륭하고 폰트도 가지런히 잘 프린트 되어 있습니다. 노브 모서리의 거친 마감, 메타 내부의 이물질은 다소 아쉽지만 사소한 부분이라 크게 신경쓰지는 않습니다. 추후에 진공관을 텔레풍켄 ECC82 리브드 플레이트로 교체할 계획인데 소리가 어떻게 바뀔지 기대가 됩니다. 메디움 MK3 때문에 ECC82도 롤링하게 됐으니 참으로 막막하고 우려스럽습니다. 

 

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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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병익 선생님과 일면식도 없는 제가 제품을 보지도, 듣지도 않고 구매한 것은 돌이켜봐도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진공관 외길을 걸어오신 서병익 선생님의 뚝심이 제게 용기를 줬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다행스럽게도 무모한 도전은 실패가 아닌 성공으로 끝이 났습니다. 시중에는 수많은 DAC가 있지만 진공관 DAC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특히 메디움 MK3처럼 OP 앰프를 사용하지 않고, 하드와이어링으로 제작한 아날로그 진공관 DAC는 더욱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메디움 MK3의 가격은 200만원대입니다. 뛰어난 완성도와 매력적인 소리를 경험한 저로서는 가격정책이 믿어지지 않습니다. 진공관을 좋아하는 오디오파일에게는 축복과도 같은 일입니다. 다음 공제 때는 많은 분들이 무모한 도전에 동참하길 기대합니다. 진공관에 대한 집착이 더욱 심해질 수 있다는 부작용은 감수해야 합니다. 훌륭한 제품을 만들어주신 서병익 선생님께 깊은 감사 인사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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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1

  • 서병익 2024.01.10 13:39

    선생님.... 많이 바쁘실 텐데도 이렇게 장문의 글을 올려 주시어 고맙습니다...^^

    다행히도 메디움 MK3가 마음에 드신다니 더 고맙습니다.

     

    메디움 MK3를 받으시고 문자나 전화로 음질이 마음에 드신다고 감사의 인사를 하시는 분이 많으시지만,

    요즘 바쁜 세상이다 보니 사용기를 올려 주시는 분은 거의 없으십니다.

     

    오늘 올려주신 사용기는 제작자와는 다른 시각으로 메디움을 평가할 수 있는 자료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사용하시다 조금이라도 불편하시거나 궁금하신 점이 있으시면 언제든지 전화 주십시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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